오르비를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냥 정들었던 포럼에 올리는데요
게시판 성격에 안맞는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디로 냉큼 가라고 해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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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방청소를 하려는데
선반에 뭔가 종이 뭉텅이랑 파일철이 난잡하게 꽂혀있는게 눈에 띄었다
뭘까 저런걸 아직도 안치웠네...
해서 들어올렸더니
... 발등으로 종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자기소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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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많이 가고 싶었나보다
빽빽한 자기소개서가 한둘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서 자기소개서 쓰던게 생각났다
잠이 많다는 핑계로 한시 이후에 자본 적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세시, 네시까지 잠 못이루면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코피가 나오려는건지 코끝이 찡하고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내겐 명문대 입학에 대한 책임감이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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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스프링 노트가 보였다
두꺼운 노트 세 권
색깔만 다를 뿐 크기도 모양도 같다
안에 낙서하듯 필기된 내용도 모두 같다 수리영역 연습장이네
수학의 정석. 을 푼 흔적만 가득했다
1학년때는 고리타분하고 누가 저딴걸 보나 싶어서 쳐다도 안보다가
2학년 여름방학이었나
내가 가고 싶은 명문대 커트라인과 나의 격차는 원점수로 100점이상.
심리적으로는 넘사벽. 자신감이 무너져내려가던 그 때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매달린 책이었다
정석책 옆면의 색이 손때가 묻어 점점 어두워지던.
그걸 낙으로 알고 그 노트를 채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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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을 열어보니 신문 스크랩이 가득했다
논술 필승전략.. 수험생의 올바른 공부자세.. 합격수기.. 이러면 승리할 수 있다...뭐..등등
하.. 지방 일반계 학생들은 참 불쌍하다
학교 선생님들은 옛날 얘기만 하고있고 아무것도 모르고 명문대 간 선배도 몇 없고
'왜
내가
혼자
알아서
해야하지?
저기요 아는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 선생님들은 내가 Barron's AP 보고 있으면 딴짓하는 줄 아실까 모의고사나 잘보라실까
넌 왜 튀냐ㄱ...ㅗ 하라는대로는 안하냐ㄱ...ㅗ
'논술시험이 있댄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건데 전북에는 시험장이 없네
'광주까지 가야지.. 힘들다
'KDI 경제경시다 와 큰 시험인데 아 서울가야되는구나
'오라니까 가야지...
'증권경시? 오 틈새시장인가 대전에서 보는구나 공부많이했으니까 장려상이라도 타겠지 ㅎㅎ
'어? 신분증이 어디갔지?
'저기 정말 죄송한데 신분증을 놓고 와서요 ㅠㅠ 팩스떴으니까요 지금 전송중이에요
'안됩니다. 규정이 ~ '...네? '응시 자격이 없습니다.
'AP시험장도 없어? 어떡하지.. 아 맞다 외고에선 많이 볼꺼야 외고에다가 전화해 봐야겠다
전화통 붙들고 전화하다가 한국외대부속외고에서 외부학생도 응시가 가능하다고 했다
'휴 다행이다 근데 외대부속외고가 어디지? 아 용인...용인외고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새벽별보면서 밤새 갔다
손님은 우리뿐, 아무도 없는 빈 식당에서
부대찌개 먹었던게 지금도 기억난다
어차피 수능으로 온 거 생각하면
이 모든게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단순한 추억 이상으로 나한테 도움이 되는 일들이었다
이런 노력들은 자기소개서를 쓸 때 즈음에나 칭찬받았고 아니꼽게 보던 시선도 달라졌다
항상 친구들이랑 장난치고 사고치고 웃고 떠들었지만 이런 면에서는 좀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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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생각해보니까 다 혼자 한 일들은 아니네
지가 무슨 영웅이라고.. 다 도움 받았으면서 그런다
새벽까지 자기소개서 쓸 때는 엄마가 아들 글 쓴거 한번 봐주시겠다며 눈 비비면서 앉아계셨고
입학후 계속 떨어지는 성적에도 공부하라며 재촉하지 않고
걱정되셨을텐데도, 수능내신공부 외에 쓸데없는 걸 한다며 뭐라하지도 않으셨고
새벽에 뒷좌석에서 자고 있는 아들을 태우고 용인까지 데려가신 것도 부모님이었다
아들이 사춘기라고 수험생이라고 짜증부리고.. 다투고 나서도,
출근하기 전 말없이 아들 방에 신문 스크랩을 밀어넣으시던 분이 아빠였다.
그것들은 모두, 혹여 공부하는 아들이 잠이라도 깰까봐 조심스레 밀어넣던 아빠의 손길을 한 번씩 거친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고대 면접날, 가을인데도 뜬금없는 한파로 유달리 추웠던 그 날, 기운내라면서 굳이 두분 같이 올라오셔서 응원해주시고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아들 등 뒤에 화이팅을 외치면서도
시간이 없다고 빵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게 한 것을 미안해하시던 그런 부모님이었다
푼다고 사 놓고 안푼 문제집이 반절은 됐는데 그것도 다 부모님 돈이었다
수능 시험날, 춥다며 핫팩이랑 따뜻한 도시락을 건네주던 손과 시험 끝내고 나온 아들을 반겨주던 그 손은 같은 손이었다
엄마는 그날 스트레스에 복통이 있었다고 하셨다 아빠는 일이 손에 안잡혔다고 하셨다
그 덕분인지 마음놓고 수능을 치렀다 아들 보는 시험을 자기 일보다 더 걱정하시는 그런 분들.
합격의 기쁨에 날뛸때도 부모님 품에 안겨서 폴짝폴짝 뛰었다오랜만에 안아보는 부모님의 품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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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들은 그때보다 조금 컸고 부모님들은 조금은, 작아지신 것 같다
선반위에 물건 좀 꺼내달라고 엄마가 부르셨다 내겐 높지 않은 높이였지만 엄마는 '우리 아들 키 진짜 크네 라고 하셨다
그렇게 안방을 나서는데 주무시고 계신 아빠의 침대가 조금 커 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침대가 커진 것은 아닌 것 같다
내일이면 아빠는 가족들보다 한시간 일찍 일어나실 거다
아빠는
그렇게
자식들의 더 나은 교육환경을 위해서
한시간 거리의 학교에 출퇴근하셨다. 8년동안 그러셨다
초등학생으로 이사를 왔던 나는 벌써 대학생이 되었고 동생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둘 다 많이 컸다. 8년동안
8년동안 아빠 등은 조금 작아진 것 같다
엄마는 체력이 좋지 못하시다
이제 곧 두달간의 단기휴직을 마치고 다음주부터 학교에 나가신다
반달동안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연금과 월급을 계산하시던 엄마는
계속 다녀야겠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다음주부터 학교에 나가신다
곧 대학생이 둘인데 돈이 많이 나간다는 이유였다
접촉사고 이후 두달간 매일매일 물리치료 받으시던 몸을 이끌고 강단에 서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애들을 키우는 일은 더 힘들다
부모님은 그 피곤하고 힘든 일을 둘 다 하고 계셨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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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뻘글인데 어디다 올려야 할지 몰라서
옛날에 열심히 활동했던 게시판이라 올렸어요
공부는 혼자하는 싸움이 아니고
부모님도 함께하신다는 걸 느끼시면서
수험생 여러분 대학 잘 가시길 빕니다
ㅠㅠ 으어 저도 부모님께 감사한데
기대보다 열심히 안하는것 같아서 너무 죄송하고...
이제부터라도 기대에 부응하는 노력을 보이면 되죠 ㅎㅎ
저도 수능 이후엔 열심히 살지 않은 것 같아서 이제라도 열심히 하려구요 ㅠ
지금은 뭐하시고 계세요?
대학진학 후 휴학하고 공익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때는 신나게 놀기만 했는데 되돌아보니 조금 후회가 되네요
반수하는 아이를 위해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을까 하여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가 이 글을 보게 되었네요..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귀하의 마음가짐 그 자체만으로 부모님의 베품에
9할이상 보답하고 있다고 봅니다.
귀하가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귀하가 좋아하는 일을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때 나머지 1할이 채워질 것이라 봅니다.
모든 수험생 여러분 다시한번 파이팅 하세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자녀분 반수 꼭 성공해서 원하는 대학교 가시길 빌어요 ㅎㅎ
저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부모님한테 잘해드려야겠어요
원하는 대학 진학은 효도의 일부인 것 같아요 좀 큰 일부요
이제 나머지 채워야죠 ㅎ
원빈이다 원빈
핑겅핑겅
아 ㅡㅡ 조때따 오르비 접어야지
간만에 들어왔더니만
선배님 글이 너무 좋아요^^
아...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