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병처럼 앓았던 그 애
게시글 주소: https://wwww.orbi.kr/00026350659
내 열일곱 살 때 그 애는 이미 내 우주였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에게서만 나는 묘한 냄새 같은 것이 있다.
집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사랑에 둘러싸여 자란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그런 동류의 냄새를 기막히게도 잘 맡아낸다.
항상 외로움에 둘러싸여 자란 그 애는 내 냄새를 그렇게 맡고 내게 다가왔었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나름 성격도 밝고 여자 애건 남자 애건간에 그 특유의 싹싹함으로 손쉽게 구워삶는 타입이었지만
정작 집에는 항상 혼자 돌아가고
남들 다 있는 핸드폰 하나 없이 항상 주말을 혼자 나는 그런 아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애는 결코 가난한 집 자식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 낡은 지갑 안에는 천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과 함께 꼬깃꼬깃 접힌 편의점 영수증 따위만 어지럽게 굴러다녔지만
그 아이 아버지는 이 지역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으며
그 애의 어머니는 중학교 선생님 출신으로 근처의 나름 이름있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소위 여사님이었고
두 살 차이나는 그 애의 여동생은 피아노 전공으로
근교의 학생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고 다닌 장래의 기대주였다.
그 애는 내게 혹은 친구들에게 그런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지역 외곽에 있는 그 으리으리한 3층 주택 대신에
학교 근처에 조그만 자취방을 얻어 살았다.
3평이 좀 안 되는 그 습기찬 방에서는 가끔씩 곱등이도 튀어나오고
소위 돈벌레라 불리는 그리마도 심심찮게 기어나와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 애는 그런 벌레 따위보다 자기 가족들을 더 무서워했다.
성적 학대는 아니야. 맞고 자란 것도 아니야.
그래도 나는 우리 집이 너무 외롭고 무서워.
다가오는 그 애와 어렵사리 친구가 되고
어느 누구도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런 것과 다름없는 관계로 발전하며
나는 그 애의 자취방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가끔은 학원까지 빠져가며 두드렸던 문이지만
사실 그 안에 들어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등을 돌아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그 애는 티비를 봤고
내가 그 애의 만화책들을 읽으며 낄낄대고 있으면 그 애는 내가 빨아 놓은 제 빨래들을 갰다.
어쩌다가는 동네 비디오방에서 오래된 DVD들을 잔뜩 빌려와 보기도 했고
그러던 도중에 서로에게 기대어 발바닥을 서로 맞춰 보고는 했다.
나는 그 방에서 그 애와 키스를 하고 마침내는 그 애와 잤다.
미성년이라는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까지 어떤 성적 경험도 전무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거 같다.
성관계 혹은 순결에 대한 어떤 명확한 개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난 딱히 그것들이 무섭지 않았고
그냥 연인의 사랑에 있어서의 당연한 수순을 밟는다는 느낌으로 그 애에게 안겼다.
지금 돌아보면 올바른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후회는 않는다.
사랑했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억에 있다.
그 애가 내 처음이라는 게 좋았다. 두 번째나 세 번째가 아니고
그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왔던 내 처녀성을 그 애가 앗아감으로서
내가 세운 그 아이 기억의 묘비에 한 줄 더 적어넣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지만
어떤 관념적인 첫 번째가 아니라
몸을 섞음으로서 그 애가 정말 실체적인 기억이 되어 내 몸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게 좋았다.
그 애는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고
열일곱 겨울에 학교 숙직들의 샤워실 수건걸이에 고요히 목을 맸다.
1.6미터도 채 안 되는 그 높이에서 180을 웃도는 그 애가 그 낮은 곳에 목을 매며 얼마나 발악을 했을지
난 가끔 그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고 또 곱씹어 보고는 한다.
어떤 말도 남기고 떠나지 않았지만
난 그 애 가족들도 끝내 밝혀내지 못했던 그 애의 자살 원인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그건 그 애가 처음 내게 다가왔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같은 사람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외로운 냄새. 오직 느낌으로만 알아챌 수 있는 것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기억에는 영속성이라는 게 있어
나는 그 애가 떠난 뒤 몇 년이 지나고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 제대로 남자를 마주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상실의 고통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다 믿었어도
비슷한 향수 냄새를 맡거나 툭 튀어나온 목의 결후같은 걸 바라보다가 보면
그 사소한 요소들이 바늘처럼 내 기억의 주머니를 툭 터뜨려
나로 하여금 그 이성과 그 애의 얼굴을 겹쳐보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내가 누군가를 또다시 사랑하는 게 무서운 건
내가 열일곱 살에서 영원히 멈추어버린 그 아이를 아직껏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이 트라우마를 똑바로 직시하고 해소하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
열일곱 겨울에 못박혀 있는 내 어떤 부분이 영원토록 성인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나 역시 알기 때문이다.
나와 어떤 관계의 종결점도 맺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버린 그 애 때문에
어딘가 정착할 듯 말 듯 애매하게 떠돌고 있던 그 애와 나의 관계성이 결국은 그 모호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앞으로 성장하고 나아가 정착하려는 내 무의식적인 부분을 일부러 붙잡아 그 열일곱에 속박해 두려 하고 있음을
몸만 어른이 된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1. 안긴문장의 안긴문장까지 고려해라 인기가 많은 철수는 유명한 모델이 되었다....
-
전남친 새끼 때문에 이게 뭐냐 에휴
-
여기, 식어 버린 오르비를 되살릴 단 하나의 비책이 있다. 0
그것은 바로 '9모'. 9월 모의평가가 시행되자마자 너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
암구의살갗 0
개멋있네
-
생1 2학기 내신준비 시작하려는데 문제집 추천 부탁드립니다 1
우선 한종철 철두철미 개념완성이랑 자분기 구매했고요 자분기는 개념 어느정도 나가면...
-
얼버잠 0
잘자요
-
손.
-
객관적으로 드릴5 수2 난이도. (1등급 이상만 답변 부탁)
-
유출벌레들이 제실력으로 받으니까 무보정컷이 좀 숨통이 트이는듯
-
글삭 욘나귀찮내 1
ㄹㅇ
-
슬슬 1
흠..아니다
-
다들 갓생살러 간거구나 조..좋은거야
-
시대인재 김강민 화학 단과는 왜 자리가 많은거예요? 0
엄천 잘 가르친다고 하던데 단과는 왜 자리가 많은건가요 너뮤 어려워서그런가..??
-
서바시작하면서 강기원t 등록했는데 첫수업 듣고 앞으로의 주제들에서 강기원쌤의 풀이를...
-
생존자있나요
-
고딩 때 성대가 설명회왔을 때 나눠줬던거에요......
-
잔다 0
-
할 생각중인데……… 물론 미친놈마냥 두개 다하려다가 망하지않을거고 그냥 개념이...
-
부지런행
-
이 개같은짓 1년더 못해…. 지금 너무 힘듬
-
무려 문학이 24 6모 독서 + 25 6모 논리학 지문 3점보기 및 주제 적극반영...
-
캬
-
자고 일어났더니 뭔가 오르비기 활발해진 것 같은...
-
질문받습니다 22
저같은 퇴물에겐 궁금한게 없을거 알아요
-
죄송합니다 ? 8
넌 진심이 아냐.
-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해낼거같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은 있다
-
같이 밤샐사람? 7
N수생만 ㅎㅎ
-
나는 수밍어 4
여러분의 친구
-
제발 압축수면
-
뭐 커리어만봐도 당연한얘기긴한데 총격 예정을 알고있었다 이런 찌라시는 제쳐두고도 그...
-
진짜 말도안되게 재밌네 분명 불과 몇달전까지만 해도 답지 안보고는 한문제도 못풀었는데 막 풀리네요
-
어제 처음 봤능데 머릿속에 팜응옥 얼굴이랑 멜로디가 게속 생각남 어떡함 잠ㅇㅣ안옴
-
밤에 손잡고 산책중이었는데 민서라고해야하는데 민지라고 해서 걍 썸 터지고 ㅈ 말음
-
전체 내신 1.55, 고대식 1.46 나왔습니다 학교는 그냥 동네 평반고...
-
안광 왜이래 0
사진에 눈 한쪽은 안광있고 한쪽은 없음
-
음~클났네~ 0
나는 감자 그것도 싹인 상태
-
냥파스~ 0
추억이다
-
아 졸립다 0
-
의대 증원 이슈는 늦어도 내년 3월에 종결날 겁니다. 2
모집 정지 대병 파산 군의관/공보의 문제 다 제끼고 가장 큰 문제는요. 제 예상에는...
-
아 릴스에 ㅈ같은 게 너무 많아
-
후하후하 볼게많다
-
치과 무물 20
이시간에 질문이 있을까요 뭐든 답해드려요
-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의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한다.
-
푸른거탑 재밌다 0
요즘 쇼츠 푸른거탑 보는 낙에 삶
-
대학생 과외 구하고 잇는데 트아파트에 잇던 전단진데 근처 모 대학교 의대생이고 수능...
-
너도 나 좋다고 할거잖아 -대배우 민찬기의 어록
-
https://youtu.be/0VSRMRh8fEs?si=Rp1u4raDazoOrca...
에..글 출처가 어디인가요?